Thursday, November 16, 2006

상황논리

2년전 과학사 수업에서,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원폭 개발계획과 그 실패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에 대해 발제할 기회가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은 '독일의 원폭 개발을 최대한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손수 원폭 개발의 책임자가 된 것이 바로 원폭 개발 저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건 '원폭 개발 실패'라는 상황을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발제문에 이런 식의 변명을 '상황논리'라는 말로 표현했었는데, 당시 수강생들 대부분이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한 명이 그 말의 뜻을 물어봤고, 나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자주 약속에 늦는 친구에게 어느날 "너 약속에 왜 늦었어?"라는 질문에 "길이 막혀서요"라고 대답한다면 그런 게 상황논리라고 설명했다. 수업이 끝나고였던가... 다른 한 명이 "그 상황논리란 말 철학용어니? 포퍼가 썼다고 들은 것 같던데.." 나는 금시초문이었기에 "모르겠는데. 난 학부 때 무지 자주 쓰던 말이라서. 특히 평가 같은 거 할 때 상황논리로 평가하지 말자는 식으로 무지 자주 썼었거든."

2년이 지난 어제, <쿤 대 포퍼>를 읽으면서 새삼 이 기억이 떠올랐다.

포퍼는 "사람은 자신의 관념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주변 사물, 상황에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평가로는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다.
포퍼가 보기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는 "사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의식적인 평가를 통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과거의 선택(특히 잘못된 선택)을 상황논리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선택을 상황에 모두 양도하는 것이 되고,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이런 포퍼의 감수성을 볼 때, "상황논리"란 용어는 아무래도 포퍼가 만든 말이 맞는 것 같다. 그에게 '상황논리'란 '비겁한 변명'의 다른 말이 아니었을까.

지난 2년간 "과거는 과거의 맥락에서만 평가해야 한다"는 쿤을 비롯한 역사학의 감수성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면, 어제 책을 읽으면서 잠자고 있던 포퍼의 감수성이 깨어나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책이 가진 오만가지 단점을 커버해줄지도 모르겠다.

3 comments:

Anonymous said...

역사적 감수성->상황논리->변명,
철학적 감수성->절대논리->보편진리,
이런 구도를 연상시켜 잠깐 발끈했었음.

zolaist said...

포퍼는 대충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
어떻게 보면 순진한 사람이지 ^^;

난 그래도 포퍼의 감수성을 버려선 안된다고 봐.

zolaist said...

방금 구글에서 situational logic, popper로 검색해보니 약 86300개의 검색결과가 나오네. 내용을 좀 보니까, situational logic은 포퍼가 제안한 용어가 맞는 것 같긴 한데... 내 예상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 같진 않네..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