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9, 2006

<쿤 대 포퍼> 해설 초안

스티브 풀러(Steve Fuller)의 {쿤 대 포퍼(Kuhn vs. Popper)}는 1960년대에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S. Kuhn)과 칼 포퍼(Karl Popper)가 벌인 논쟁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를 파헤친 책이다. 쿤과 포퍼는 20세기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거장으로, 과학철학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두 사람의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포퍼는 과학이 추측과 논박을 통해 발전하며 '반증 가능성의 원리'를 통해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철저히 구획할 수 있다고 믿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쿤은 과학이 검증이나 반증과 같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교과서적 관념을 무너뜨린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쿤의 1962년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paradigm)'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패러다임이란 탐구의 성공적인 모범사례(examplar)와 그것이 미래의 탐구에 제공하는 청사진 모두를 의미한다. 확립된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자들은 근본적인 의심을 삼가고 틀에 박힌 문제 풀이 활동에 매진하게 되는데, 쿤은 이러한 활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소해 보였던 문제가 계속 풀리지 않는다거나 그러한 미해결의 문제가 점점 증가하게 되면 패러다임은 '위기'에 처하고, 오직 그 때에만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분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규범을 정하는 광범위한 토론에 참여하게 된다. '혁명'은 실행 가능한 대안적 패러다임이 발견되었을 때에만 일어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과 기존의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 따라서 혁명의 종식은 합리적 논증에서의 승리보다는 정치적 설득, 종교적 개종 그리고 세대 교체에 의해 달성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시작된다.
"과학 혁명이 초래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개종과 흡사하다"는 쿤의 주장은 과학의 합리성을 세속화함으로써 과학의 인식론적 지위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읽혀졌는데, 이러한 독해에 의하면 과학적 합리성이란 고작해야 특정 시기 과학자들이 합의한 패러다임에 의존할 뿐이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쿤의 개념들은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1980-90년대에는 인간의 지식(과학)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하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으로 보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사회구성주의적 인식론의 기초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쿤은 자신이 포스트 모더니즘과 사회구성주의의 정신적 지주로 간주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상대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로 공격하는 다른 과학철학자들에게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변호해왔다. 도대체 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며, 포퍼는 어떤 점을 불편해했던 것일까? 1965년 실제 벌어졌던 논쟁에서 오갔던 말들을 살펴보면, {쿤 대 포퍼}에서 풀러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쿤과 포퍼 사이의 직접적인 논쟁은 1965년 7월 런던대학에서 단 한번 벌어졌는데, 이 논쟁에는 포퍼의 제자였던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와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도 참여했다. 이 논쟁은 5년 후 라카토스의 제자인 무스 그레이브(Alan Musgrave)에 의해 보완되어 {비판과 지식의 성장(Criticism and Growth of Knowledg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한국에도 {현대 과학 철학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논쟁은 쿤의 비판적 논문으로 시작되는데, 오늘날 이는 포퍼의 과학 방법론에 대한 결정적 비판으로 평가받는다. 쿤에 따르면, "칼 포퍼 경이 강조하는 테스트들은 용납된 이론의 한계를 조사하거나 혹은 현행의 이론을 극도로 긴장시키기 위해 수행되는 것들이다. ... 그러나 그와 같은 에피소드들은 과학의 발전에서 대단히 드물게 나타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관련된 분야에서 위기가 선행되었거나 현존하고 있는 연구의 규범과 경쟁하는 이론이 출현했을 경우뿐이다." 또한 "모든 이론들은 기존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서도 다양한 임시방편적인(ad hoc) 조정을 통해 수정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즉, 쿤은 이론과 맞지 않는 변칙사례가 등장할 때마다 이론 전체를 폐기한다면 그 이론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심도 깊게 탐구할 기회를 뺏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풀러도 인정하듯이, "비판은 오직 특정 조건에서만 생산적이며, 예를 들어 어떤 연구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는 생산적이지 않다. 쿤은 이점을 분명 포퍼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반면, 포퍼는 이러한 과학활동이 비판정신을 말살시키는 독단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과학이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라고 믿는다. 즉, 과학은 대담한 추측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약간의 독단주의가 필요하다고, 즉 독단적 과학자가 수행할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나는 항상 강조하였다. 그러나 만일 너무 쉽게 비판에 양보한다면 우리의 이론들이 실제로 힘을 발휘할 곳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결코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 내가 보건대 쿤이 기술하고 있는 '정상'과학자란 우리가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 내가 보건대 '정상'과학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다. ... 그는 독단적 정신을 배웠다. 말하자면 그는 세뇌를 당했다. 그는 왜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서도 응용될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 나는 이런 류의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태도는 엔지니어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 훈련된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나는 다만 그런 태도 속에,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 속에, 내가 전문화의 경향 속에서 느끼는 것과 유사한, 커다란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것은 과학에 대한, 실로 우리 문명에 대한 위협이다."
파이어아벤트도 비슷한 우려를 표명했다. "[쿤의 사회과학의 계승자들]에 따르면 [성공적인 과학의] 비결은 비판을 제한하고, 광범위한 이론들의 수를 하나로 줄이며, 이 단일한 이론을 그 패러다임으로 갖는 정상과학을 만드는 것이다. 학생들이 서로 다른 노선들을 따라 숙고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거기 만족하여 멈추지 않는 동료들은 '더 중요한 연구'를 하도록 순응시켜야 한다. 이것이 정말 쿤이 원하는 목표인가? 어떤 집단과 동일시되어야 할 필요가 점점 증가하는 것을 역사-과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인가?"
포퍼와 파이어아벤트는 논쟁에서 쿤이 지적한 비판에 대해 근거를 들어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과학은 비판적 활동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당위 수준의 우려와 반대를 표명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논쟁은 쿤의 승리로 결판났지만, 풀러는 "그것이 보다 나은 쪽의 승리였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과학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 패배한 포퍼의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풀러는 쿤의 과학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과학이 무비판적이며 민주적 견제장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쿤의 과학적 변동의 이론에서 철학적 감시는 찾아볼 수 없다. ... 쿤의 정상과학은 마피아와 왕조, 종교적 질서의 특징들만을 결합한 정치적으로 원시적인 사회 구조였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그저 자기 한 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책임지도록 정식으로 강제하는, 오늘날의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직상의 안전장치들을 결여하고 있었다." 우리의 지식이 특정 시기에 형성된 패러다임에 의존한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지만, "그것을 안정의 원천으로 다루느냐(쿤), 아니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다루어야 하느냐(포퍼)는 다른 문제이다." 또한 "첨예한 '위기'의 상태에 접어든 패러다임에 대해서만 비판을 허용하는 쿤의 보수적인 자기만족은 또 다른 극단이었으며, 이 또한 라카토스는 참을 수 없었다." 당연히 풀러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풀러가 보기에,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민주적 견제장치가 결여된 과학자들의 자율적인 권력으로 성장해버렸는데, 쿤의 영향력 하에서 진행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역사적, 사회학적) 연구들은 이를 조장하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풀러는 쿤의 역사관이 지적으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한다. 포퍼와 라카토스, 그리고 저자인 풀러가 보기에 역사에는 실현되지 않는 가능성들이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다. 즉, 현재는 최선의 결과가 아니며, 현재는 언제나 현재보다 더 나을 수 있었다. 현재가 현재처럼 된 것은 과거 행위자들의 특정한 선택 결과이다.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는 현재와 다를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고,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쿤 이후의 과학사 서술은 과거에 대한 평가를 최대한 배제한 채, 역사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그리는 데 주력한다. 이들은 역사적 과정을 어쩔 수 없었던 일 또는 예측치 못했던 우연한 일로 그림으로써, 당시 행위자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행위들을 합리화해주고 만다. 풀러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자기 반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풀러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비판적 정신'과 '책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두 가지 태도를 갖추지 못한 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풀러의 주장과 책 전체에서 보여준 일련의 작업은, 그동안 쿤의 계승자들이 쿤의 인식론적인 측면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그 이면의 정치적·윤리적 함의를 파헤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저자의 포퍼주의적 편향은 또다른 우려를 낳는다. 여전히 포퍼는 여타의 의미있는 이론적 시도들을 자연과학의 기준에 비추어 재단하고 평가하는 보수적인 목적에 이용되고 있다. 반면, 여성주의자와 환경주의자들이 현재의 지배적 과학관을 비판하기 위해 쓰는 이론은 포퍼의 것이 아니라 쿤의 것이라는 점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최후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기고자 한다.

1 comment:

Anonymous said...

아까 얘기한 것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문장이 변한 것 같아...